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일본 제국과 중일전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apan_1914.jpg|width=100%]]}}}|| || {{{#000,#fff 1914년 시점의 일본 제국 영토}}} || [[일본 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며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섬]]을 얻고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일본령 가라후토|남사할린]]과 [[대한제국]]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바쁘던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수출을 하여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오르며 경제적 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는 짧은 민주주의를 맞이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숨을 고르며 다시 생산력을 되찾자 유럽, 미국 등 서방에 비해 열등한 품질을 가진[* 당시 [[일본제]]의 이미지는 21세기 현재 [[중국산]]이 가진 이미지와 비슷했다. 지금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건 1970년대 이후.] 일본의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올라선 일본 제국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20년간 이어져오던 [[영일동맹]]은 깨져버렸고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해군 규모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와중에 닥친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자 경제권인 [[수도권(일본)|수도권]]을 초토화시켜 일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의 [[쇼와공황]]과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덮치자 일본 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군부의 입김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exblog.jp/c0190486_0384494.jpg|width=100%]]}}} || || 군 장교들에게 암살 당한 일본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 ||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층은 국민들의 불만 감정을 앞세워 정부에 대한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켰으며, [[관동군]]은 민간 정부의 통제를 무시한 채 멋대로 날뛰며 [[만주]]를 침공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로 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일본은 산업은 크게 성장했으나 자체적으로 자원은 매우 부족해 해외의 수입으로부터 크게 의존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천연자원이 넘치는 만주의 점령은 일본의 생명줄로서 크게 지지 받았다,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세계의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하였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사실상 고립주의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5.15 사건|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급진파 장교들에게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가 되어 정당정치를 단절시키자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 {{{#!wiki style="margin:-15px -10px"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raki_Sadao.jpg|width=10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377149_hideki-todzo_ff.jpg|width=100%]]}}} || || [[황도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신 || [[통제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lUJ-BCxebM)]}}}|| || [[황도파]]를 상징하는 음악인 [[청년일본의 노래]] || 일본 정치를 장악해가던 군부는 크게 두가지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황도파]]로 이들은 일본의 모든 재벌, 기득권 등을 타파하고 [[쇼와 덴노]]에게 전권으로 주어 국가적인 개조를 실시하자는 일명 "쇼와 유신"을 주장하는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제파]]로 이들은 황도파의 주장에 크게 반대하며 [[자본주의]]와 [[입헌군주제]]의 유지-강화를 주장했었다. 황도파가 주장하던 쇼와 유신은 1930년대 극우 사상가들의 목표로, 일본의 부패한 기득권층을 처단하고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자는 매우 국가주의적 사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에 만연하던 빈부격차와 사회불안을 내면에 담고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 악화, [[미국]]의 [[https://ko.wikipedia.org/wiki/1924%EB%85%84_%EC%9D%B4%EB%AF%BC%EB%B2%95|1924년 이민법]]과 [[동북역치]]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대폭 상실하는 등 대외상 불안전화로 말미암아 군부 급진 세력이나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한때 좋았던 시절 [[메이지 유신]]의 정신 부흥과 천황의 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대외적으로는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통제파는 이러한 황도파의 주장에 반대했다. 이들은 군의 [[문민통제]]가 존중되고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은 물론 소련과 중국에 대한 외교적 입장도 정반대로 대립했다. 암살 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이후 집권한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황도파는 통제파에 밀려 서서히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이로 인한 불만이 쌓이자 결국 1936년 2월 26일, 20대 청년 황도파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2.26 사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ainichi.jp/012.jpg|width=100%]]}}} || || [[2.26 사건]] 당시 진군하는 [[황도파]] 군인들 || >下士官兵ニ吿グ >하사관·병에게 고함 > >一、今カラデモ遲クナイカラ原隊ヘ歸レ >1.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자대로 복귀하라 >二、抵抗スル者ハ全部逆賊デアルカラ射殺スル >2. 항거하는 자는 전부 역적이므로 사살한다 >三、オ前達ノ父母兄弟ハ國賊トナルノデ皆泣イテオルゾ >3. 너희들의 부모형제는 역적이 되어 모두 울고 있다 > >二月二十九日 戒嚴司令部 >2월 29일 계엄 사령부 >---- >황도파 군인들의 투항을 독려하는 [[삐라]] [[2.26 사건]]을 일어난 당시는 이미 황도파가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에 상당히 밀려난 때로, 항거한 황도파 장교들은 대게 20대의 소위부터 대위가 중심이 된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초기 도쿄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거하고 [[사이토 마코토]][* 제3대, 5대 조선 총독, 제30대 일본 총리. 사건 당시에는 내대신(內大臣)이라는 [[천황]]을 보좌하는 직책이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제20대 일본 총리.], [[스즈키 간타로]][* 15년 가까이 궁내성의 시종장을 지내며, [[쇼와 덴노]]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책임자로써 황도파로부터 간신으로 찍힌 인물이었다. 2.26 사건에서 피습을 당했으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후일 제42대 일본 총리가 된다.] 등 일본 최고위층 인사들을 대거 습격해 대다수를 살해했다. 황도파의 최우선 목표였던 당시 현직 일본 총리인 [[오카다 게이스케]]는 겨우 이들을 피해 차량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탈출하자마자 차에서 담배부터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쇼와 덴노]]가 황도파가 항거에 '''매우 격노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당황하던 천황이였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한 쇼와 덴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 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쇼와 덴노의 노여움을 초래하였다.[* 위에 황도파가 습격한 인물들을 잘보면, 하나 같이 전부 쇼와 덴노와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2월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졌고, 쇼와 유신을 외치던 황도파는 순식간에 명분을 잃고 혼란에 빠져 일부는 자결을 시도했다. 다음날 군부는 병력 2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육군 뿐만 아니라 해군 또한 해군 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살해 당한 것에 분노해 함대를 끌고와 진압에 참여했다.[* [[나가토(전함)|나가토]] 등 도쿄 앞바다에 있던 제1함대 예하 함정들이 2월 27일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전투배치지시와 함께 함포를 주요 육군 주둔지에 조준하고 여차하면 발포할 준비를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yFgRYjef8k, start=6)]}}}||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兵に告ぐ 장병들에게 고한다. 敕命が發せられたのである。 칙령은 이미 하달되었다. 旣に天皇陛下の御命令が發せられたのである。 이미 천황폐하의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お前達は上官の命令を正しいものと信じて絶對服從をして、誠心誠意活動して來たのであろうが、(お前達の上官のした行爲は間違ってゐたのである。) 너희는 상관의 명령을 옳은 것으로 믿고 절대 복종하여 성심성의껏 활동해 왔겠지만 (너희 상관이 한 행동들은 잘못된 것이다.)[* 괄호가 쳐진 부분은 영상에서 생략되었다.] 此上お前達が飽くまでも抵抗したならば、それは敕命に反抗することとなり逆賊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만일 너희가 끝까지 저항한다면 그것은 폐하의 명령에 반항하는 것이고 역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正しいことをしてゐると信じてゐたのに、それが間違って居ったと知ったならば、徒らに今迄の行がゝりや、義理上からいつまでも反抗的態度をとって天皇陛下にそむき奉り、逆賊としての汚名を永久に受ける樣なことがあってはならない。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동안 저질러온 행동이나 상관과의 의리를 핑계로 계속 반항적 태도를 취하여 천황폐하께 반기를 들어 역적으로서의 오명을 영원히 뒤집어 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今からでも決して遲くはないから直ちに抵抗をやめて軍旗の下に復歸する樣にせよ。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즉각 저항을 그만두고 지휘체계 아래로[* 원문은 "군기 아래로"] 복귀하도록 하라. そうしたら今迄の罪も許されるのである。 그러면 지금까지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お前達の父兄は勿論のこと、国民全体もそれを心から祈ってゐるのである。 너희의 부모형제는 물론 모든 국민 전체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다. 速かに現在の位置を棄てゝ歸って來い。 신속하게 현재의 위치를 이탈해 자대로 복귀하라. 香椎中將 가시이 중장.(사건 당시 계엄사령관)}}} || || 사건 당시 황도파 반란군을 설득하는 라디오 방송. || 결국 황도파는 투항하기 시작했다. 2월 29일 오후 2시 무렵 병사들과 하사관들이 먼저 투항했고 오후 5시에는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와 고노 히사시 대위가 자결했다.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파면]]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현역 총리 암살 사건이었던 [[5.15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으므로 이들도 그와 비슷한 처분을 기대했으나 앞서와 달리 '''천황'''의 이름을 팔아먹은 데다 단순 테러 수준을 넘긴 본격적인 [[쿠데타]]였기에 중형이 선고됐다. 그 해 7월 쿠데타에 가담한 현역 육군 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천황 폐하 만세!([ruby(天, ruby=てん)][ruby(皇, ruby=の)][ruby(陛, ruby=へい)][ruby(下, ruby=か)][ruby(万, ruby=ばん)][ruby(歳, ruby=ざい)]!)"를 외치면서 총살되었다. 이렇게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완전히 자멸해버리자 일본 군부 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통제파는 세계의 열강 각국에서의 [[집산주의]] 대두, 대공황에 대해 효용성을 나타낸 블록 경제에 대한 선망이 나타나면서 당초의 결성 목적・본분으로부터 천천히 빗나가 합법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자신들과 맞지 않는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통수권 침범"을 방패로 공공연히 비협력적인 태도・행동을 취하는 군 파벌로 변해갔다. 이들을 근대적인 군비나 생산 기구의 정비에 근거하는 [[총력전]]에 대응한 고도국방국가를 구상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대동아공영권.png|width=100%]]}}} || || 1940년대 일본 제국의 최대 판도 ||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한 일본 제국은 아시아를 서구 열강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 정책에 기반하여 팽창주의, 군국주의적 행보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후 1940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의 [[삼국 동맹 조약]] 체결로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